강유원 철학사 제 09강: Platon의 ‘좋음’의 형이상학: 좋음(agathon), 내 것(oikeion), 불멸(athanathon), ‘eros의 사다리’ («향연», 172a~212c)

Ⅰ. 도입

인간의 욕망은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어디를 향해야 인간은 비로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自覺的이고 實存的인 決斷에 따른 삶은 그 자체만으로 존중받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좋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개인의 決斷과 意志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삶이 보편적(普遍的)인 것에 근거하고 않고, “선함”을 지향(志向)하고 있지 않다면, 다수 삶과 다른 하나의 ‘독특한’ 삶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다. “좋은” 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며, “올바른” 사회 속에서 행위하기 위해 窮極的으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Platon은 그의 대화편 «향연»에서 “좋음”을 가능한 한 다양한 측면에서 살피고, “좋고, 아름답고, 올바른” 삶을 일종의 本(paradeigma)의 형태로 제시한다.

Ⅱ. «향연»의 구성

1.

«향연»은 세 겹으로 된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외부이야기가 내부이야기의 ‘액자’가 되는 것이다. 독자의 시선은 내부로 향한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액자’ 속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되는 까닭이다.

2.

액자식 구성의 내부이야기는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 이야기로 여겨지는바, 이는 내부이야기의 신뢰성(信賴性)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액자’ 자체가 引用을 위한 따옴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話者의 主觀的 한계는 액자가 거듭될수록 제거되며, 독자(讀者)는 화자(話者)가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한다고 여기게 된다.

3.

«향연»의 첫 번째 ‘액자’ 속에는 다른 시점(視點)을 가진 ‘액자’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이 ‘액자’들 탓에, 상대적으로 협소(狹小)했던 話者의 限界가 횡적으로 확대된다. 서로 다른 인물들의 서로 다른 세계관이 “조금씩 자기 몫의 기여를 해내는” 까닭이다. 역자에 따르면, «향연»의 ‘액자’들은 “그저 그 답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나 과정’에 불과”한 것도 아니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해서 … 의미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끊임없이 물어지고 되새겨지고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4.

«향연»은 과거의 이야기를 “상기(想起)”하는 구성을 취한다. 극 중 話者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의 이야기는 아리스토데모스(Aristodemos)가 전해준 이야기의 재생(再生)이다.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전해지기도 하고, “기억할 만한” 것이 아닌 것은 생략되기도 한다. (178a, 180c) 이는 그가 “떠나가는 기억 대신에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어 넣”는 개입과 반성의 “연습”을 통해, “앎을 보존”(208a)해왔음을 암시(暗示)한다. 그런데 연습에 의해 보존된 Apollodoros의 이야기가 다름 아닌 “지혜(philos) 사랑(sophia)에 관한 이야기”(173c), 즉 철학(philosophia)인바, «향연»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곧 철학함(philosophieren)임이 드러난다.

Ⅲ. «향연»의 내용 – 소크라테스 이전의 논의

1. 등장인물과 주제설정

멋을 부린(kalos) 소크라테스(Socrates)는 아리스토데모스(Aris htodemos)와 함께 아가톤(Agathon)의 집에서 열린 향연(symposion)에 참석한다. 그러나 파이드로스(Phaidros),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에뤽시마코스(Eryximachos),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아가톤(Agathon) 등은 전날 마신 술로 여전히 “버거운” 탓에, “즐거울 만큼만 마시자”고 “결정을 보”고, Eryximachos의 제안에 따라, 향연을 이야기로 채우기로 합의한다.

Eryximachos는 “지금, 여기 참석한 우리들”이 Eros를 찬양하는 게 “알맞다”고 판단하여, “에로스(Eros) 찬양”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답게”할 것을 제안한다. 시인들은 다른 신들을 시로써 찬미하고, “쓸 만한 소피스트들”은 헤라클레스(Hercules)와 같은 영웅을 산문의 형식으로 찬사하며, 어떤 “지혜로운 사람”은 소금마저 그 유용함을 찬양하는데, 그 누구도 Eros에 대한 찬양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에, 無知를 자처하는 Socrates조차 Eros에 관한 일은 조금 안다며 동의를 표하고, 곧이어 “이야기의 아버지”인 Phaidros의 첫 번째 Eros 찬양이 시작된다.

2. Phaidros의 연설 : 용기와 명예의 추동력(推動力)으로서의 Eros

Phaidros는 헤시오도스(Hesiodos), 아쿠실아오스(Akousilaos),,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를 引用하여 Eros가 “가장 오래된 신”임을 밝힌다. 그는 가장 오래된 것을 “최대로 좋은 것들의 원인”으로 여기는바, 따라서 에로스(Eros)는 “최대로 좋은 것” – 사랑받는 자(에로메노스: eromenos)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자기를 사랑해 주는 쓸 만한 사람을 갖”고,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가 “쓸 만한 소년 애인을 갖는 것 – 의 원인이 된다.

그는 Eros가 “용기”를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한다. Eros가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와 “사랑받는 자(에로메노스: eromenos)”가 서로를 의식하여 “추한 것들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서는 열망”하도록 이끄는 까닭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로 구성된 군대의 효능(效能)을 묘사(描寫)하기도 한다.

Eros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음조차 무릅쓰게 하는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그는 Eros의 인도(引導)로 삶을 버렸거나, 버리고자 했던 者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동원(動員)한다. 펠리아스(Pelias)의 딸 알케스티스(Alcastis)가 남편 대신 죽기를 자처한 이야기, 오이아그로스(Oeagros)의 아들 오르페우스(Orpheus)가 아내를 하데스(Hades)로부터 구출하려한 이야기, 그리고 테티스(Thetis)의 아들 아킬레우스(Achilleus)가 파트로클로스(Thetis)를 뒤따라 죽음을 선택한 이야기“가 그것에 해당한다.

Phaidros는 引用과 事例로 그의 논의를 뒷받침하지만, Eros가 최고(最古) 신이라는 그의 주장은 Socrates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 자신의 견해에 따라 Eros의 기원을 다르게 설정하여, 각자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는 까닭이다. 심지어 Agathon은 Eros가 가장 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5b) 이렇게 본다면, Phaidros가 Eros를 최고(最古) 신으로 규정(規定)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의 원인이라는 그의 주장까지 타당한 것은 아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Eros는 가장 오래된 탓에 가장 좋지 않은 것의 원인이라는 주장 역시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Phaidros가 제시한 事例는 “최대로 좋은 것”이라는 ‘성인 남자와 소년 간의 사랑’을 뒷받침할만한 일관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각의 사례들이 ‘성인 남자와 소년 간의 사랑’이라는 단일한 주제로 포섭(包攝)되지 않는 까닭이다. 다만, 因果關係의 착오와 방법상의 非一貫性에도 불구하고, “용기”라는 덕목은 Socrates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3. 파우사니아스(Pausanias)의 연설 : Eros의 질적 구별과 nomos

Pausanias는 Phaidros의 Eros 찬양이 잘못된 방향설정 탓에 논의의 정교(精巧)함을 잃었다고 지적한 후, 기원을 기준으로 삼아 Eros를 質的으로 區分한다. 그는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을 “더 나이 든, 어머니 없는, 우라노스(Uranus)의 딸”과 “더 젊은, 제우스(Zeus)와 디오네(Dione)의 딸”로 區分하고, 前者를 천상의 아프로디테(Aphrodite)로, 後者를 범속의 아프로디테(Aphrodite)로 規定한 후, 각각의 Aphrodite를 각각의 Eros와 결부(結付)시킨다.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아름다운” 행위는 없고, 행위방식에 따라 그것의 美醜가 결정되는바, 그런 까닭에 “아름답게 사랑하도록 유도하는” 천상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 속한 Eros만이 讚美를 받을 자격이 있다. 천상의 아프로디테(Aphrodite)는 범속의 아프로디테(Aphrodite)와 달리, 본성상 “남성만 나눠 갖고 있”어서, 이와 결부된 Eros 또한 “지성을 더 많이 가진”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 소년을 사랑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는 Eros 가 “어린 소년들을 사랑”하게 이끈다는 Phaidros의 주장에 대한 反論이기도 하다. Pausanias가 보기에 “어린 소년들을 사랑”하는 것은 “결과가 불분명한 일에 많은 열성을 쏟아 붇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에게 살갑게 응하는 것(charizesthai)을 추한 일”이라고 여기게 하는 인식을 조장하는 일이기도 한다. 그는 사랑의 행위는 “질서에 따라 그리고 법에 맞게(182a)” 행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질서에 따라”가 ‘천상의 아프로디테에 속하는 Eros의 인도(引導)’를 따르는 것이라면, “법에 맞게”는 ‘아테네의 nomos’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Pausanias는 이제 그리스 사회 일반의 “사랑에 관한 법(nomos)”을 검토한다. 그리스에는 ‘소년 사랑’을 완전히 허용하는 국가도 있고, ‘소년 사랑’을 추한 일로 간주하는 국가도 있다. 前者에 속하는 국가로는 엘리스(Elis)와 보이오티아(Boeotia)를 들 수 있는데, 그에 따르면, 그곳에서는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들에게 살갑게 응하는 것(charizesthai)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단순하게” 법(nomos)으로 정해져 있다. “말로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번거로움을 겪”는 것을 원치 않는 까닭이다. 다른 한편, 이오니아(Ionia)의 여러 곳과 다른 많은 곳에서는 ‘소년 사랑’과 “지혜를 사랑하는 일(philosophia)” 그리고 “체력단련을 좋아하는 일(philogymnastia)”이 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이런 요소들이 참주 정권의 유지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Pausanias가 말하는 ‘소년 사랑’이란 지혜 사랑’과 ‘체력단련’, 즉 교육의 다른 말인바, 이는 교육이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는 말이요, 그런 까닭에 ‘소년 사랑’은 계몽(啓蒙)의 노력이기도 하다.

다른 국가와 대조적으로, Pausanias에 따르면, 아테네의 사랑에 관한 법(nomos)은 어떤 者를 사랑하고, 어떤 者를 하는 지를 훌륭하게 시험하는 법(nomos)인 동시에,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와 사랑받는 자(에로메노스: eromenos) 모두 “자기 덕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도록 강제”하는 법(nomos)이기도 하다. 이런 법(nomos)을 기반으로 삼아야만,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가 “사리 분별 및 다른 덕에 있어서 기여할 능력”을 소년 애인(에로메노스: eromenos)에게 전해주고, 소년 애인(에로메노스: eromenos)이 이에 對應하여 “자기를 지혜롭고 훌륭한 자로 만들어 주는 者(에라스테스: erastes)에게” “살갑게 응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된다.

Pausanias의 연설을 들으며 차례를 기다리던 Aristophanes는 딸꾹질을 일으킨다. 딸꾹질을 일으키는 원인은 다양하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것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이에 어쩔 수 없이 Eryximachos가 Aristophanes의 차례를 대신한다.

4. Eryximachos의 연설 : Kosmos 차원에서의 Eros

Eryximachos는 Pausanias의 質的 區分은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적용범위를 확대할 것을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Eros는 사랑하는 자(에라스테스: erastes)와 사랑받는 자(에로메노스: eromenos) 사이, 즉 인간들 사이에서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 만물에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이다.

Eryximachos의 해명은 경험적 차원에서 출발한다. 그는 의사로서의 경험에 근거하여, 신체 내부의 “여러 적대적 요소들”을 관계짓는 것이 Eros의 기능임을 밝힌 후, 그 결합을 조화롭게 이끄는 것을 “아름다운 Eros”로, 그렇지 못한 것을 “추한 Eros”라고 規定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사란 각각을 잘 구분하여, “아름다운 Eros”가 이끄는 대로 의술을 펼치는 者다. 체육기술과 농사기술을 이끄는 Eros도 의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Eryximachos는 “여러 적대적 요소들”의 결합이라는 Eros 개념을 시가 기술에도 적용한다. 이 과정에서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의 “그것 자체가 자신과 불화하면서도 화해한다 … ”라는 言明이 원용(援用)되기도 한다. 여기서도 Eros는 적대적인 “고음과 저음”, “빠른 템포와 느린 템포”를 관계짓는 기능을 한다. 그 결합이 “천상의 뮤즈(Muse) 여신에 속한 Eros”에 의해 조화로움으로 이끌어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송가의 뮤즈(Muse) 여신에 속한 Eros”에 의해 “방종(放縱)”에 빠질 수도 있는 까닭에, 적어도 ‘시가작곡과 시가교육’에 한해서는 각각의 Eros를 잘 지켜봐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者가 훌륭한 시가술을 펼치는 者이다.

“별들의 움직임”과 “한 해의 계절들의 구성”도 “질서 있는 Eros”와 “방자함을 가진 Eros”에 의해 규율된다. 서로 대립하는 성질의 것들이 前者에 의해 引導된다면 “절제된 조화와 혼화(混和)”로 귀결되지만, 後者가 더 많은 힘을 갖게 될 때는 역병과 질병, 그리고 서리와 우박과 같은 사태가 발생한다. 결국, Eros는, Eryximachos에 의하면, 천문학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원리인 셈이다.

Eros에 관한 Eryximachos의 논의는 신과 인간을 매개(媒介)하는 제사와 예언술로까지 확대된다. “누군가가 질서 있는 Eros에게 살갑게 응하지 않고 … 그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지도 않으면서 오히려 나머지 한 Eros에게는 그렇게 할 경우” 두려운 일이 생기는 까닭에, 예언술을 하는 자는 “온당함과 경건으로 이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앎으로써 신들과 인간들의 친애를 만들어”야 한다.

Eryximachos에 따르면, Eros는 “여러 적대적 요소들”을 결합하는 원리다. 이를 근거짓기 위해, 그는 각각의 영역에서 대립 구조를 확인하고,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Eros에 의해 이루어진 결합의 결과를 상술하는 동시에, 이 원리를 점차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해 나간다. 최초의 “가까우면서 눈에 보이는 의술”에서부터 시작하여, “가까이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가 기술”과 “멀리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천상을 다루는 천문학”을 거쳐, 종국에는 “멀리 있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의 영역을 담당하는 제사와 예언술”까지 이르는 것이다.

Eryximachos가 보여준 것은 기술(techne)이 가진 힘으로서의 보편성이다. 그러나 그가 논의한 기술적 원리가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서도 유효(有效)한 것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제아무리 보편성을 갖춘 우주적 원리라고 해도, 그것이 ‘내’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무용(無用)한 까닭이다. 흔히 철학을 보편학이라 일컫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제1의 목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Eryximachos의 연설은 인간 삶을 규율하는 원리가 보편성 以上의 것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Socrates가 전하는 디오티마(Diotima)의 말에 따르면, Eros의 사다리를 오르는 인간은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210e) 된다. 이는 보편성의 획득 이후, 일종의 단절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5. Aristophanes의 연설 : 인간의 비극적 운명과 내 것(oikeion)

희극작가 Aristophanes는 신화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욕망하는 원인을 ‘생생하면서도 비극적으로’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본디 남남, 여여, 남녀로 이루어진 존재였고, 그들의 힘과 능력은 완전함에 가까웠다. 그러나 神들마저 공격하는 오만함을 부리자, 제우스(Zeus)는 각각의 인간을 “터럭으로 계란을 자르는 자들이 하듯” 둘로 잘라버린다. “계속 살아 있”게 하면서도, “힘이 약해져서 방종(放縱)을 멈추게” 하기 위함이다. “본성이 반으로 잘”린 “반쪽들은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며 찾아 헤맨다. 그런데 다시 만난 반쪽들은 “팔을 얼싸안고 뒤엉켜 한 몸”이 된 채로, “아무것도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간다. “그들을 가엾이” 여긴 제우스(Zeus)는 “남성을 통해 여성 속에서 생식 하도록 해” 줌으로써, 인간이 계속 생겨나게 하나, 인간은 행복했던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다. 배꼽을 통해 완전했던 시절을 상기(想起)할 수 있을 뿐이다.

상처 입은 인간들은 Eros를 통해 행복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Aristophanes의 Eros 論은 잘려진 반쪽 모두가, 남녀의 구분 없이, 서로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Pausanias의 質的 區分에 대한 반박임과 동시에, Eros가 ‘지식과 사랑의 교환’을 媒介한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비웃음이기도 하다. 모두가 불완전한 존재일 뿐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서서 지식을 전수하고, 다른 한편이 그에 대한 대가로 “살갑게 응”함을 제공할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Eros를 “여러 적대적 요소들”을 관계 맺게 해주는 원리라고 규정한 Eryximachos의 주장 역시 논박된다. 잘려진 반쪽들은 온전함의 회복을 ‘한마음으로’ 바라는 까닭이다.

자기 반쪽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Aristophanes의 견해(doxa)는 좋음(agathon)을 내 것(oikeion) 안에 종속(從屬)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Socrates는 디오티마(Diotima)의 입을 빌어, 사랑은 “반쪽에 대한 것도 전체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밝힌다. 좋음(agathon)과 내 것(oikeion)의 지위를 역전시키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것이라 해도 “나쁘다고 생각될 때면” “발이나 손”마저도 잘라낸다. Socrates에 의하면, 사람들이 반기는 것은 “내 것(oikeion)”이 아니라, “좋은 것을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인 까닭이다.

6. Agathon의 연설 : 비극작가의 희극적 찬양

비극경연대회의 우승자 Agathon은 Eros야말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Eros는 아름답다. Eros는 신 중에서 가장 젊고, 가장 섬섬하며, 형태가 유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Eros는 가장 훌륭하다. 그는 정의롭고, 절제하며, 용기 있고, 지혜롭기 때문이다. Socrates는 “단어와 구절의 아름다움”을 “찬양 대상” 옆에 갖다 붙이는 Agathon의 수사학적 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럴 ‘능력’이 없는 ‘아둔한’ Socrates는 “자신의 방식에 따라서 말”하기 시작한다.

Ⅳ. «향연»의 내용 – Socrates와 Diotima의 대화

1.

Socrates는 Eros가 가장 아름다운 신이라는 Agathon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Socrates는 먼저 Eros가 “뭔가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뭔가에 대한 존재”라는 것에 관해 Agathon의 동의를 얻는다. 이어서 그는 “뭔가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을 파고들어 “뭔가를 욕망하고 사랑”한다는 의미로 풀이한 후, 마침내 ‘뭔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를 욕망’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Eros는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Eros가 아름다움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사랑한다’라는 의미로 변화한 것이다. 따라서 Eros는 아름답지도 않고, 올바르지도 않고, 좋지도 않으니, Eros를 아름다운 神으로 여기고 찬양하는 것은 잘못이다. 즉, Eros는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주체인 것이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연설자들이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한 자”로 찬양한 것은 Eros를 에로스를 사랑받는 대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2.

Socrates는 ‘액자’ 속에서 그와 Diotima 간의 “대화”를 꺼내어 들려주기 시작한다.

3.

Diotima는 ‘Agathon에 대한 Socrates의 논박’을 출발점으로 삼아 ‘대강의 Eros’를 그린 후, 神話를 이용해 그의 정체를 具體化한다. Aphrodite가 태어났을 때, “메티스(Metis, 계책)의 아들 포로스(Poros, 방도; 男神)가 … 취기에 짓눌려 잠이 들”자 “페니아(Penia, 곤궁; 女性)가 그의 곁에 동침하여” 태어난 게 Eros다. 그는 아름답지도 않고, 좋지도 않으며, 神도 아니고, 지혜롭지도 못하다. 그렇다고 그가 추하거나, 나쁘거나, 必滅하거나, 無知한 것도 아니다. 지혜로운 神은 이미 지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지 않고, 無知한 者는 자신이 無知하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사랑하지 않지만, Eros는 지혜를 사랑한다. Eros는 아름다운 것을 욕망하는 존재인데, 지혜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 중 하나인 까닭이다. 그런 까닭에, Eros는 지혜로운 자와 無知한 者 사이에 있는 중간자이다.

4.

Diotima는 Socrates에게 “무엇 때문에” Eros가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지를 묻는다. 아름다운 것이 “자기 것이 되기”를 욕망하는 까닭이라는 Socrates의 최초의 답은 이제 문답의 과정을 거쳐, 점차 정교해지기 시작한다. Diotima는 “아름다운 것”을 “좋은 것”으로 대체하여 ‘좋은 것들을 자기 것이 될 때 무엇이 생기는지’를 반문한다. Socrates의 답은 행복이다. 행복은, Diotima와 Socrates에 따르면 “더는 물을 필요가 없는” 최고의 목적으로서, 이는 “모두에게 공통된” 바람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Eros는 좋은 것이 자신에게 늘 있음에 대한 것”(204d-206a)이라고 규정된다. 즉 좋은 것이 자기 것이 되면 행복할 텐데, 좋은 것을 제 안에 가지고 있지 않은 까닭에, 그것이 늘 자신에게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것이 Eros다.

5.

Diotima는 “늘”이라는 말을 검토함으로써, Eros의 기능, 즉 Eros가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일을 하게 하는지를 살핀다. 必滅하는 인간의 몸과 영혼은 “각각이 어느 때고 각자에게 같은 것으로 있지 않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심지어 앎조차 이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좋은 것을 “늘” 소유하기를 욕망한다는 말은 불사를 욕망한다는 의미를 가진 것이다. 이제 “좋은 것이 늘 자신에게 있는 것에 대한 것”이라는 Eros는 의미는 ‘좋은 것과 더불어 不死함에 대한 것’으로 수정 보완된다. 즉 Eros는 좋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좋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 이외에도, 영원함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영원함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다. Diotima는 이를 만족시키는 사례를 크게 두 부류로 제시하는바, 하나는 몸을 통한 임신과 낳음, 즉 생물학적 출산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을 통한 임신과 낳음 – “분별력과 덕”을 임신하여, 작품과 법률 등을 낳음 – 이다. 임신과 낳음을 통해야만 비로소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을 不死의 차원으로 옮기는 것이 가능해지는 까닭이다.

6.

마지막으로 Diotima는 아름다움 자체를 찾아가는 과정을 상술한다. 우선 “하나의 몸을 사랑하고, 그것 안에 아름다운 이야기를 낳”아야 한다. 그런데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몸만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이 하나임을 깨달아, 몸 일반에 대한 사랑(Eros)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내 몸’에 대한 개별적인 사랑이 ‘보편적 몸들에 대한 사랑’에 의해 극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 것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Aristophanes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는 낭만적이다. 그러나 두 반쪽이 하나가 되면, 외부세계에 존재하는 좋음에 대한 사랑(eros)은 소멸할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다른 좋은 것’에 대한 사랑이 설 자리가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Platon이 보기에, 인간은 자아의 울타리를 벗어나 좋은 것을 찾고, 찾아낸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듦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을 재규정해야 하는 존재다.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 일반’에 대한 사랑(Eros) 이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상승(上昇)해야 한다.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역시, 보편의 과정을 거쳐 “특정 행실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서로 동류”임을 알아야 한다. Eros의 사다리를 오르는 者는 이 과정에서 “몸에 관련된 아름다움이 사소한”것이라는 反省을 하게된다.

행실들의 아름다움을 거친 후에는 앎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으로 상승해야한다.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되면, 몸과 개별적인 행실의 아름다움에 이끌린 수동적인 “노예 노릇”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아름다운” 사유들을 산출해 낼 수 있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아름다움 자체, 즉 근원적인 하나의 아름다움이 ‘덮쳐’온다. 그것은 인간의 주관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감소하거나 증가하거나 생성하거나 소멸하지도 않은 채로, 늘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 자체는 인간의 경험과 지식의 한계 너머에 客觀的으로 實在하는 絶對的 존재인 것이다.

Eros의 사다리는, 마치 «향연»의 구성처럼, 인식의 ‘수평적’ 확대와 ‘수직적’ 상승이 겹쳐져 있다. Eryximachos의 기술(techne)은 그 ‘놀라운’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을 규율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정신에 호소하지 않는 까닭이다. Platon이 Eryximachos와 다른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인간이 행복 할 수 있는 길을 객관적으로 정초했다.

7.

Socrates는 Diotima에 의해 설득되었고, 설득되었기에 그와 같은 논리로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려 한다고 말한다. 그 자신부터 납득하고, 확신하고, 진실로서 확인해야, 비로소 다른 이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는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설득의 기술’을 파는 당대의 소피스트들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난이 비단 소피스트에게만 향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Ⅴ. 맺음

향연에 참석한 이들은 플라톤이 «향연»을 쓴 서기 전 385년경에는 이미 죽고 없었다. 이들의 末路를 당시 아테네인들은 알고 있었다. Phaidros와 Eryximachos는 서기 전 415년에 종교적 추문에 연루되어 추방되거나 피소되었고, Agathon과 Pausanias는 서기전 408년경에 아테네를 떠나 마케도니아(Macedonia)의 아르켈라오스(Archelaus) 궁정으로 망명했다. 이후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배신자로 낙인찍히고, 망명처 소아시아의 프뤼기아에서 자객의 손에 살해당한다. Aristophanes는 Socrates를 죽음으로 내몬 “최초의 고발인들”(변론 18a)중의 한 사람이었다.

인간은 왜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가?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움을 추구해야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으면, 자기도 비참하고, 남도 비참하게 만든다. 지금 내가 참으로 행복하지 않다면, 인생을 제대로 살아왔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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